관계에서 실수했을 때 배우는 것은 경험이나 노련함만이 아니라, 자신을 수용할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보통 우리는 실수를 통해 경험을 쌓는다고 합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되거나, 그런 실수에도 예전 보다 덜 민감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보게 되면, 실수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만 보는 것입니다. 실수를 했을 때 나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변화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책에서 나온 부분이 이런 경험과 연관되어 한 번 적어보려 합니다.
 
곤란한 상황에서 당신이 상처받았다면, 친밀함이 깨질 수도 있다. 이때에는
가능한 빨리 아이와 사랑의 유대를 다시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시 
친밀함을 형성하게 되었을 때, 당신이 아이에게 주는 메세지는, 괜찮다고, 실수할
수 있고, 사람들은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그리고 사랑 받기 위해선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 S. Hart, V. K. Hodson. Respectful parents, respectful kids.
어린 시절에 실수나 어떤 일로 해서 부모와의 관계가 잠시 안 좋아졌을 때 부모가 어떻게 하면 좋은지에 대해서 나온 내용입니다. 모든 걸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것 만큼 맘 편한 것도 없지만, 위의 글은 과거에 국한되지 않고, 현재 진행형이기에, 그리고 제가 한 경험과 연관이 있어 인용해 봅니다.

연애 관계에서 자신의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일일이 보여주고, 이해받길 바라는 것만큼 상대를 피곤하게 하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보이지만, 저를 잘 본 사람은 압니다.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가차없다는 것을... 지난 며칠 동안 이 같은 일이 있었고, 계속 신경을 썼습니다. 외부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내 생각에 대해서 내가 선택해서 하길 바라면서 힘을 모아봤지만, 제 컨디션이 낮아질 때는 어김없이 그 생각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위의 책을 보면서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습니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실수로부터 배우는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지금도 새롭게 배우고 경험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해서 기뻤습니다. 한편, 관계에서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차없이 행동하는 제 자신을 보고 슬펐습니다. 그 사람에게 또 하나의 선물(괜찮아, 실수할 수 있고, 사람들은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 받기 위해선 완벽할 필요가 없다고...)을 줄 수 없다는 것에 슬펐습니다. 그건 바로 선물을 받아보지 못한 제 모습이니까요... 저는 선물을 받아보려고 계속 실수하며, 내가 선물을 줄 수 있는지 알아보려 저에게 실수한 사람들이 다가오나 봅니다. ㅎㅎ

아래와 같은 확신을 쌓아가는데 도움을 주신, 저의 실수를 받아주고 다시 저와 연결되려고 했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그런 나는 나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어."
  - 같은 책에서.

Posted by 마몸
어제 읽은 책의 내용이 이상하게 계속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 무엇이 정단하고 부당한지, 누가 나쁘고 착한지에 몰두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분석,판단,비난에 사용하게 된다...(중략)...
다른 사람의 말고 행동보다는 행동들 뒤에 숨겨진 충족하려고 하는 욕구를 생각하면 
좀 더 연민을 느끼고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 S. Hart, V. K. Hodson. Respectful parents, respectful kids.
자주 접했던 말이지만, 이 책에서는 선택의 자유란 맥락에서 생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이 맥락에서 선택에 대한 자유는, 쇼핑몰에서 어떤 물건을 살지 선택하고, 오늘 무엇을 할지 선택하는 것을 넘어서, 외부 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선택이 진짜 자유로 보입니다.

실제로, 그럴 것 같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외부 자극에 시달리니까요. 신나게 놀고온 날은, 집에서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해도 별반 큰 자극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저녁 거르고 힘겹게 집에 들어간 날은 어머니의 말들이 돌덩이처럼 저를 누르고, 목이 부어 삼키기 어려울 때처럼 크게 느껴지니까요. 

어제는 상대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제가 겪었던 당황스러운 일들에 대해 늘어놓는 저를 보았습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귀 기울이기 보다는 언제 저 말이 끝날까 신경쓰면서, 제 얘기를 했었지요... 씁쓸했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가장 어머니에게서 견디지 힘든 부분인데, 그걸 제가 하고 있었네요. 뭔가 털어놓지 않으며 간질거리거나 얹힌것같아, 상대를 가리지 않고 그냥 쏟아내려는 그것... 한편으로 슬펐습니다. 상대의 기분이 어떤지, 상대의 상황이 어떤지보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들을 쏟아내고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또, 본인은 그걸 모르고 있다는 것에...

한 꺼풀씩 벗겨지는 것 같습니다. 가슴에 늘 힘이 들어가 언제든 반격 하려고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힘든 것을 감지하기도 전에 추가적인 어려움이 닥쳐왔다는 것을... 

자신의 생각과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닌 상태를 겪어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A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간단하게 A가 아닌 것을 보면 됩니다. 물론 A와 Aa, Ab, Ac 등 A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가도 알 수 있지만, 배움의 순서상 거칠게 접근해서 세밀하게 나가는 것이 더 잘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마음챙김 훈련과 같은 명상에서는 지켜보라고, 알아차리라고 하면서 A하나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을 연습합니다. 하지만, 먼저 거칠게 A가 아닌 것을 맛보면 됩니다. 제 가슴이 딱딱하게 굳었다는 것은 가슴이 녹아 풀어지는 경험을 통해 대번에 알았고, 어머니에게서 내가 무엇을 힘들게 느꼈는지는 어머니와 평화롭게 지낸 경험을 통해 녹이 묻어나듯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외부 자극을 내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것, 내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생각들에 대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이 두가지...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Posted by 마몸
중국 전통 의학과 인도 전통 의학에 관한 책을 한 권 번역하고 있는데, 도교에서 말한 문구가 자꾸 맴돌아 한 번 적어보려 합니다. 중간에 찾아볼 내용이 있어 인터넷을 검색했는데 도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나왔습니다. 
도(道)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도가 만물 생성의 총원리이니, 만물이 계속 변화하면서 도 또한 변하게 되고 영구 불변의 도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름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어떤 진리나 깨달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보통 같이 등장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언어 이전의 세계"라든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 등입니다. 

언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사람과 소설가와 같이 언어를 주무르는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의 총량은 다를 것입니다. 위에서 말하는 맥락은 아마도 이와 같은 어휘력 차원이 아니라, 언어의 차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류라고 생각됩니다. 차원이 다른 것이지요. 언어가 부족하다면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자, 그럼 저 "언어 이전의 세계" 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의 존재 유무는 나중에 따지더라도, 그리로 가려면 우리는 언어 표현력에 대해서 얼마나 배우고 익혀야 할까요? 언뜻 생각해 봐도, 언어는 그냥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익히면 되고, 그 세계로 가기 위한 것은 그 나름대로 익히면 되지 않을까요?

1. somebody 대 nobody 논쟁
그런데, 이와 비슷한 논쟁이 한참 전에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누릴 것을 누리는 삶을 사는 사람을 somebody 라 하고, 이런 삶을 넘어선 사람들을 nobody 라고 할 때, "somebody 가 되지 못한 사람은 nobody 도 될 수 없다." 는 말이 한창 유행했습니다. 즉, 평범한 삶도 다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너머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깨우치기 전 속세에서 누릴 것을 누리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게 되었었습니다~ 꼭, 음모론으로 보진 않는다 해도, "somebody 가 되지 못한 사람은 nobody 도 될 수 없다." 라는 주장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nobody 로 가려고 하는 somebody 들입니다. 자신들이 걸어가는 길이 반짝이는 것이지요~ 

이후 somebody 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nobody 로 갈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고, 이 두 주장이 오고가며 논쟁을 일으키다가, 현재는 somebody 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nobody 로 갈 수 있다는 주장이 어느 정도 판정승을 거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nobody 가 아닌데, nobody 인 것처럼 보이는 증상을 구분해 놓았습니다. 즉, 현실을 넘어선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현실에 적응도 못하는 것입니다. nobody 와 엘리트 주의가 손을 잡을 뻔했지만, 다행히도 잘 결론이 났습니다.

실제로 '바이런 케이티'나 '에크하르트 톨레'처럼 수행을 하던 사람이 아니라, 우울증에 시달리다 어느날 갑자기 "나는 더 이상 나 자신과 함께 살 수 없어." 라고 회의하며 자신과 분리된 또 하나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언어를 간파해야 언어 이전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어 이전의 세계만 탐구해서는 언어를 사용해야 살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살기 힘듭니다. 꼭 somebody 가 되어야만 nobody 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nobody 가 되려고만 노력한다고 해서 nobody 가 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세상이 변화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nobody 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증산도에 다닌다는 주변 분에 대한 생각과 노자가 말한 '도' 가 머리에서 맴돌면서 자꾸 어지러웠나 봅니다. 증산도에 가서는 열심히 증산도하고, 증산도 밖에서는 다른 거 열심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연스레 도구와 목적으로 이야기가 옮아가는 것 같습니다. 너무 거창하게 얘기가 될까봐 저의 경험에서 다시 출발해야 겠습니다.

2. 도구와 삶 논쟁
중국의 전통 의학과 인도의 전통 의학에 대한 책에는 중국의 기본 철학과 인도의 기본 철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두 나라의 전통 모두는 이 세상에 깃든 원리를 알고, 그 원리를 통해 몸도 낫게 하고, 세상도 이해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후에는 두 전통들 사이에서 오늘날 처럼 정보와 물자와 사람들이 계속 오고 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커다란 체계들은 오늘날 비슷하면서도 참 다릅니다. 세상을 이해하려고 수 천년간 노력했지만,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이 그 이해하려고 했던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도구 입니다. 각자 자신에게 가장 알맞는 도구가 있을 것입니다. 한편 때와 장소에 가장 알맞는 도구가 있을 것입니다. 저도 NVC 를 잘 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NVC 로 사는 것의 차이를 알고 기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것을 배워서 그걸 자신의 삶에까지 일치시켜 산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면서도 이루고 싶은 바램이겠습니까. 그런데, 요새는 도구를 잘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계속해서 도구를 들고 있으면, 계속 그 도구를 사용해서 삶을 요리해 먹고 싶어질 테니까요. 

한편 이론이라는 것도 도구와 방향은 다르지만 삶과 관계하는 맥락은 같지 않을까 합니다. 가끔은 현실을 앞서나간 이론들에 대해서 다들 너나 할 거 없이 배우곤 합니다. 그 이론을 통해서 현실을 이해하고, 현실을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이론은 매우 훌륭한 일을 합니다. 그런데, 한 발만 잘못 딛어도 이론은 이론대로의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한발은 계속해서 현실에 딛고 있어야 하는 데 말이지요. 예전에 브릿지 프로젝트에서 페미니즘 세미나 하다가 제 고민의 지점은 "페미니즘이 삶을 압도하는지, 삶이 페미니즘을 압도하는지" 라는 말을 했다가, 그건 꼴펨들이 하는 말이 아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골수 페미니스트라... 제가 그럴리는 만무하고~ ㅎㅎ 그냥, 도구나 이론이나 다 같이 공구함에 잘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좋은 걸루다 골라 썼으면 합니다~

아~ 번역 진도는 안 나가고, 딴 생각은 계속 나고... 재미없는 일을 할 때에는 왜 이렇게 머리가 활성화 되는 것일까요? ㅎㅎ

Posted by 마몸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비교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배운 분들은 꼭 이 두 가지를 비교하고 싶어합니다. 제 입장은 이거 비교할 시간에 공감을 한 번 더하든가, 호흡을 한 번 더 알아차리는 게 도움이 된다는 입장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글을 쓰는 건 또 뭔가 싶습니다. ㅋㅋ

비폭력 대화(NVC)를 배운 분들은 통찰 명상(위빠사나)를 배우기도 하고, 통찰 명상(위빠사나)를 배운 분들은 비폭력 대화(NVC)를 배우기도 합니다. 얼핏 듣기로, 비폭력 대화를 배운 뒤에 명상을 배우는 분들은 자각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얻으려 하고, 명상을 배운 뒤에 비폭력 대화를 접하시는 분들은 명상의 주관적 경험을 체계화하는데 도움을 얻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뭐~ 이정도는 수용이 됩니다.

조금 더 많이 배우신 분들은 각 요소별로 비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비폭력 대화의 '관찰, 느낌, 욕구, 부탁' 에서 '관찰'은 명상에서 말하는 관찰과 유사하고, '느낌'은 명상에서 말하는 신수심법(身受心法)에서 신(身)과 수(受)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은 비폭력 대화의 '욕구'는 명상에서 말하는 삶의 원인이자 괴로움의 원인인 갈망에 해당되게 됩니다. 그래서 '욕구'는 항시 변하는 것인, 무상(無常)한 것이 됩니다. 집착하지 말고,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하나의 대상이 되게 됩니다. 뭔가 꼬이기 시작합니다^^

비폭력 대화나 통찰 명상 두 가지 모두 이론보다는 실제 경험이 더 중요한 까닭에 저의 짦은 경험탓에 제가 비교를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헌데, 지난주 '존 커닝햄' 의 워크샵을 통해서 얻은 게 하나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이 중요한 순간에 딴짓을 해 버리는 바람에 전부 듣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대략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욕구와 만나는 순간은 "후회하는 생각들인 과거의 시간과,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한 미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지나가버린 시간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현재에 살지 못하는 것이 과거의 시간이라면, 막연하게 바라는 것은 미래의 시간인 것 같습니다. 과거의 경험에서 오는 느낌을 바탕으로 미래에 대해 바라는 것에 대한 지금의 욕구를 찾는 그 순간이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이 아닐까 합니다. 즉, 현재에 사는 것이지요. 이는 명상에서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에 집착하며 괴로워하기 보다 순간순간 새로운 삶에 적극적인, 더 나아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며 살면 되는 것이라는 가르침과는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땡~ 관념적인 비교는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Posted by 마몸
오늘 '호오포노포노'의 저자 휴렌 박사가 다음 달에 한국에 온다고 해서 얼른 검색해 보았습니다. 이하레아카라 휴 렌 박사님 서울 세미나 안내 (2009년8월29일~30일) 와 같이 호오포노포노 코리아 사이트 공지사항에 나와 있네요~

참고로 '호오포노포노' 는 하와이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치유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관련된 책들은 1년 이내에 번역되어 국내에 출판되고 있습니다. "호오포노포노의 비밀", "호오포노포노의 지혜", "호오포노포노, 평화에 이르는 가장 쉬운 길" 과 같은 책들이 나와 있고, 이들을 묶어서 세트로 팔고 있기도 합니다. 

휴렌 박사는 하와의 전통 치유법인 '호오포노포노'를 배우러 찾아들어가 이를 현대화한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로 온다고 했을 때, 살짝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틀 워크샵 비용이 백만원이 넘습니다. 그리고 환불 규정에 보면 신청 완료가 되면 정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취소는 어떠한 이유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원래 '호오포노포노'에서도 이러한 치유법이 나오기는 합니다. 꼭 만나지 않아도, 원격으로 치유가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고, 그 원리에 대해서도 설명이 나오긴 합니다. '호오포노포노'의 힘을 믿고 신청한 순간부터 치유가 된다고 믿으시는 분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간직되어 왔던 '호오포노포노' 가 현대화 될 수 있었던 것이나, 기타 명상과 관련된 치유들이 세상에서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현실의 원리와 잘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일텐데, '호오포노포노' 워크샵의 환불 규정을 보니 걱정 스럽습니다.

하지만, 잘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시크릿' 이 붐이니깐요~~
Posted by 마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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